집중분석 > 문학을 존중하는 사회로 갈 때 한국문학도 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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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분석

한국문학의 현 주소와 과제: 문학을 존중하는 사회로 갈 때 한국문학도 살아난다

글: 이현식 인천문화재단 한국근대문학관 관장, 문학평론가

1. 한국문학의 궤멸

조금 우울한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하겠다. 이미 짐작되는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정기적으로 조사되는 '국민 독서실태 조사'에 나타난 국민들의 독서율 변화 추이를 보면 하강세가 명확하다. 2013년 71.4%였던 것이 2015년에는 65.3%로, 2017년에는 다시 59.9%로 떨어졌다. 조사가 시작된 1993년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는 대부분 75%를 전후한 수준에서 유지됐었다. 그러던 것이 이제 본격적인 하강 국면으로 들어서는 조짐이 뚜렷해졌다. 독서율이란 1년에 일반도서 한 권이라도 읽어 본 국민들의 비율을 뜻한다.

다른 한편 온라인 서점 알라딘(www.aladin.co.kr)의 통계에 의하면 2018년 11월 둘째 주를 기준시점으로 베스트셀러 20위 안에 에세이를 제외하고 문학으로 분류되는 책이 모두 6권이 들어가 있다. 똑같은 기준을 적용했을 때 10년 전인 2008년 11월 둘째 주에 문학으로 분류되는 책 11권이 순위 안에 있었다. 여기에 한국문학 작가가 쓴 문학 책을 기준으로 보면 2018년에는 단 두 권만 베스트셀러로 올라가 있는데 비해 2008년에는 다섯 권이 한국문학 작가가 쓴 책이었다. 문학의 비중을 보면 10년 전에 비해 11권이 6권으로, 한국문학은 5권이 2권으로 줄어들었다. 물론 이런 단순한 시기적 비교가 일시적인 현상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문학과 한국문학의 비중이 점차 줄어드는 것은 부인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사회 변화를 보여주는 이런 수치들 안에서 한국문학의 현 주소를 단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 국민들이 대부분 책을 잘 안 읽는 경향이 고조되는 가운데 문학 책은 더욱 안 읽는데다가 한국문학 책은 더더욱 안 읽는다는 것이 오늘날 한국문학이 처한 현실이다. 한국문학의 기반부터 무너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때 한국문학의 위기가 평단의 화제가 된 적이 있었는데 이제는 위기를 넘어 궤멸 수준으로 가고 있다. 게다가 이런 사태가 이제 문단의 화제조차 되지 않는다는 것이 더욱 절망적인 상황임을 말해주고 있다. 한국문학 작품을 읽는 독자들을 만나는 것이 반가울 정도로 요즘 우리 문학을 읽는 사람들을 찾아보는 건 흔치 않은 일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한국문학이 처한 현주소는 한마디로 말하면 한국문학을 읽는 사람들이 심각한 수준으로 줄어들고 있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출판사들은 비교적 이름이 알려진 작가라 하더라도 이제 3,000부 이상 잘 찍지 않는다고 한다. 1,000부나 2,000부만 찍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고 한다. 그 만큼 책 판매가 어려워졌다는 말이다. 혼신을 다해 쓴 소설이 모두 나간다 해도 작가들에게 돌아가는 것은 고작 500만원 안 쪽이다. 15,000원 하는 단행본 한 권의 소설 인세가 10%이니 3,000부가 모두 팔린다 해도 작가에게 가는 몫은 고작 450만원밖에 안 된다. 작가에 따라서는 수년 넘게 공들인 소설이 그나마도 안 팔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런데 이런 사태가 벌어진 것은 예견되지 않은 바가 아니었다. 더구나 독서율 하락 추세는 비단 우리나라만의 상황은 아니다. 이제 사람들은, 아니 인류는 더 이상 책을 잘 읽지 않는다. 책을 안 읽어도 전혀 불편하지 않고 지루하지 않기 때문이다. 디지털 기술의 진화가 독서에 대해 치명적으로 적대적인 환경을 만들었다. 디지털 기술이 집적된 상징적 존재라 할 수 있는 스마트폰이 단적인 예이다. 지하철을 탈 때면 가끔 사람들이 무엇을 하는지 유심히 볼 때가 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거나 귀에 이어폰을 끼고 뭔가를 듣고 있다. 일상생활에서 사람들의 눈과 귀를 스마트폰이 점거해 버린 것이다. 그들은 대부분 스마트폰을 들고 게임을 하거나 동영상을 보고 누군가와 문자로 대화하지 않으면 웹서핑을 한다. 한국의 무선통신망은 지나치게 잘 발달되어 있어서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데에 어떤 불편함도 없다. 그렇다 보니 종이 책이나 신문을 읽고 있는 사람들은 가끔 마주치는 지하철 잡상인보다도 찾아보기 어렵다. 전자책을 읽고 있는 사람은 아예 본 적조차도 없다. 책을 읽어야 할 이유와 재미가 없는 것이다.

2. 문학의 공공적 역할과 의미

그렇다고 문학이 사라지거나 책이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책을 읽는 사람들의 숫자와 문학의 사회적 영향력이 축소될 수는 있어도 인류의 문명이 극적인 전환점을 맞지 않는 이상 문학은 여전히 존재하고 책을 읽는 사람들 또한 존재할 것이다. 문학만큼 인간 삶에 대한 다양한 이해와 구체적 국면을 생생하게, 나아가 감동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나 스스로의 삶과 타인, 더 나아가 세계를 반성적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예술 장르는 없기 때문이다. 영상을 보는 즐거움이 있는 것처럼 문자를 읽는 즐거움과 감동이 그와는 다른 영역 속에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윤동주의 「서시」가 주는 감동은 웬만한 영상으로는 재현하기 어렵다. 청년 윤동주가 한글이 말살되는 상황에서 써 내려간 「서시」는 시 자체로 그 울림이 얼마나 넓고 또 얼마나 지속적인가.

김영랑 생가에 있는 장독대와 시비

더구나 문학만큼 창조와 향유에 있어서 민주적이고 평등한 장르가 없다. 문학은 열정과 상상력과 창의력만 갖고 있다면 누구나 도전해 볼 수 있는 장르이다. 음악을 연주하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영화를 제작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 창작과 수련에 들어가는 비용도 그렇고 심리적 접근성도 다른 장르에 비해 현저하게 낮다. 게다가 문학은 즐기기에도 부담이 없다. 가장 원초적인 아날로그 매체가 책이므로 글자를 읽을 수 있는 환경에서라면 어디에서나 즐길 수 있다. 아울러 훌륭한 문학작품은 우리에게 재미와 감동을 줄 뿐만 아니라 나를 돌이켜 보게 만들며 내 주변과 세계를 성찰하도록 하는 사유의 힘을 준다. 언어라는 매체가 공감의 연대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문학이 다른 어떤 예술장르보다 한 시대, 한 공동체의 문화적 토대가 되고 인간적인 삶의 연대를 가능케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변화된 환경, 앞으로 더 변화될 시대에 과연 문학이, 한국문학이 어떻게 자기의 영역을 지켜나가고 더 확대해갈 수 있을 것인지를 고민하고 그 대안을 모색해 보아야 하는 것은 문학인들만의 소임은 아니다. 몇 년 전 국가에서 문학진흥법을 제정하고 문학진흥 기본계획을 수립하여 발표한 의도도 이런 데에 있을 것이다. 요컨대 문학은 우리 모두의 자산이자 공공적 가치를 갖는 존재인 것이다.

3. 문학적인 것으로의 확장과 문학 저변의 확대

그렇다면 한국문학은 어떻게 자기의 가치를 지켜나가면서도 그 영역을 확대해 갈 수 있을 것인가. 이는 몇 마디 말을 한다고 해서 해결될 성질의 것은 아니겠지만 여기에서는 두 가지의 핵심적인 원칙과 방향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는 것으로 만족하고자 한다. 우선 '문학'을 '문학적인 것'으로 확대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여기에서 '문학적인 것'이란 '문학'이 내포한 엣센스, 혹은 본질적 성격을 갖고 있으면서도 전통적인 문학 장르인 시와 소설, 희곡, 비평, 수필 등의 벽을 넘어선 것을 지칭한다. 전통적인 의미의 문학은 세상 만물의 형상과 정서, 이야기를 언어를 통해 특정한 형식(시, 소설 등)에 담아낸 것이다. 아울러 문학은 사람들이 읽어 재미와 감동을 얻고 그 결과 스스로의 성찰과 인식의 확장에 기여하는 예술 장르이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이런 문학적 본질을 공유하면서도 문학이라는 특정 장르로 귀속되지 않는 창작물들이 많다. 영화나 드라마, 가요 등이 그렇다. 언어가 근대 시대의 문학처럼 기록된 텍스트로만 이해되어서는 요즘과 같은 시대에 문학의 영역은 옹색해질 수밖에 없다. 더구나 영화나 드라마, 가요 등도 따지고 보면 모두 언어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예술장르이다. 이들을 엄밀한 의미에서 '문학'이라고 규정하기는 어려워도 '문학적인 것'이라고 해도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니다. 훌륭한 영화나 드라마, 가요, 뮤지컬 등을 통해 사람들이 받는 감동의 질은 훌륭한 문학작품을 읽었을 때의 그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문학을 이렇게 '문학적인 것'으로 확장했을 때 문학은 사회적 의미와 역할을 보다 더 명확히, 그리고 더 넓게 확대해 갈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문학의 영역을 확장하는 것이 문학의 영역을 인위적으로 넓혀서 무슨 세력을 확대하려는 것으로 받아들여져서는 곤란하다. 오히려 문학의 본의를 조금 더 명확히 함으로써 변화된 환경에서 문학의 고유한 역할을 제대로 위치 지우려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랬을 때에라야 '문학적인 것'의 의미와 역할도 조금 더 뚜렷해질 수 있다. 이런 인식이 있을 때 문학이 자기만의 성 안에 갇혀 움츠러드는 것을 막아낼 수 있다. 문학이 갖고 있는 본원적인 가치와 역할을 생각했을 때, 그리고 변화하는 시대적 환경을 고려했을 때 문학은 자기의 소임을 조금 더 개방적으로, 능동적으로 넓혀가야 한다. 훌륭한 영화와 드라마, 뮤지컬, 가요 등의 밑바탕에는 문학적 상상력과 창의력, 감수성이 자리하고 있다. 2016년 밥딜런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그런 점에서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두 번째는 문학의 저변을 넓히는 일이 필요하다. 문학은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책'으로만 존재해왔다. 많은 사람들이 문학을 접하는 것은 학교 교실에서 교과서를 통해서이거나 아니면 서점에서 사는 책을 통해서였다. 문학이라는 말을 떠올리면 항상 시집이나 소설책, 혹은 국어교과서, 문학교과서가 생각나는 것이 보편적이다. 요컨대 문학은 물질로서의 책과 곧바로 이어지는 것으로 사람들에게 인식되었다.

문학이 기본적으로 책으로 존재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문학은 책으로 존재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안에 들어있는 콘텐츠이고 그것을 읽고 즐긴 독자들의 마음과 기억도 무시할 수 없다. 아울러 문학 작품을 만들어낸 작가가 태어나고 자란 고장, 작품의 배경이 되는 무대 또한 마찬가지이다. 즉 문학이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다양한 방식이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문학은 문화 예술의 기초적인 장르여서 여타 장르와의 결합력 또한 매우 높다. 예컨대 문학을 원천 콘텐츠로 한 영화나 노래, 드라마, 만화, 회화와 조각, 연극, 뮤지컬 등 실로 다양한 영역에서 그 결과물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물론 이와는 거꾸로의 작용도 가능하다). 오늘날은 더욱 그렇고 이는 앞으로 더 늘어날 것이다. 문학의 저변을 넓힌다는 것은 문학과 연계된 다양한 부가적인 콘텐츠의 폭을 확대해 가는 일이기도 하다.

한국근대문학을 소재로 한 문학관의 전시포스터
대구문학관의 전시 패널

요즘 많이 늘어나고 있는 문학관 역시 마찬가지이다. 문학관이 과연 내실 있게 운영되고 있는가는 논외로 하더라도 문학관은 전시 콘텐츠를 매개로 많은 사람들이 문학에 접근하고 친숙해지는 통로 역할을 한다. 문학 작품을 주제로 한 산책길이나 답사코스도 있을 수 있고 생활 공간 속에서 문학을 만나도록 기획할 수 있는 여지는 널리고 널렸다. 가까운 일본에서는 문학을 주제로 한 산책 코스나 다양한 방식의 문학공간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일본 기타큐슈 시 중심상가에 있는 기타큐슈문학살롱, 기타큐슈의 문인들의 작품집이 비치되어 있고 책 읽고 얘기를 나누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일본 오노미치의 문학산책로의 표지석

결론적으로 한국문학을 살려내기 위한 우리의 의식적 노력이 그동안 부족했던 것이지 한국문학의 가능성은 결코 절망적이지 않다. '문학'에서 '문학적인 것'으로 자신의 영역을 확대해 나가고 사람들이 문학을 접하고 친해질 수 있는 다양한 방식의 기획이 뒤따른다면 한국문학의 미래를 어둡다고 말할 수는 없다. 어떻게 보면 가장 긍정적인 의미의 문화 한류의 잠재력은 우리 문학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도 문학에 삶의 의미를 걸고 창작열을 불태우는 사람들이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청년들은 물론이고 고령화 사회에 접어들면서 글을 읽고 쓰고 싶어 하는 새로운 노년 세대도 등장하려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반가운 현상임에 틀림없고 우리나라가 이제야 비로소 성숙한 사회로 가고 있는 징조이기도 하다. 다만 우리는 문학을 사회적으로 너무 소홀히 대해왔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문학을 존중하는 사회라면 그것이 바로 인간다운 사회로 가는 커다란 한 걸음이라는 것을 우리 모두 자각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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