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이슈3 > 지역명사와 함께하는 문화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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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이슈3

지역명사와 함께하는 문화여행

글: 최영욱 시인

'지역명사와 함께하는 문화여행'은 관광객들이 지역을 대표하는 지역명사와의 만남을 통해 지역명사의 경험과 가치를 공유하고 지역과 관광객을 연결해 줌으로써 지방관광을 활성화시키기 위한 사업이다.
기존의 자연관람형, 체험형, 참여형의 형태를 벗어나 지역을 방문하지 않고서는 만나기 힘든 지역명사를 만나 지역의 얘기를 함께 나눈다. 감동적이고 특별함이 있는 여행경험을 선물하는 새로운 지역관광 콘텐츠이다.
문화체육관광부(주관)와 한국관광공사(시행)는 지역의 관광자원과 이를 전달하는 사람이 결합된 새로운 여행형태를 통해 지역의 경쟁력과 부가가치를 높일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경남 하동에서 진행하는 지역명사와 함께하는 문화여행, 최영욱 시인(박경리문학관장)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지리산에서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를 모아 남해로 흐르던 섬진강이 악양에 이르러 거대한 산의 맥을 끊고선 찰진 들을 이룬다. 바로 여기가 민족이 숨 쉬는 소리로 매듭지어지고, 한국문학의 거대한 맥점을 이룬 소설 「토지」의 이야기가 시작되고 맺음 하는 곳,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다. 실제로 900여 정보로 만석지기 한둘은 거뜬히 낼만한 실로 찰진 들판이다. 여러 협곡을 거쳐 오면서도 금강이나 낙동강처럼 거대한 평야를 이루지 못했던 강은 그야말로 '아이를 가지지 못한 강'으로 불리다가 구례에 이르러 제법 튼실한 자식 하나 가졌다가 하동에 닿고서야 들다운 들을 품는 것이다.

하동읍에서 자동차로 10분여 거리를 달리면 악양의 입구 개치마을에 닿는다. 옛적 수많은 해산물과 고향으로 되돌아오는 사람들을 실은 배가 들고 나던 개치나루, 소설 속에서도 이 개치나루는 상당한 비중으로 등장한다. 용이가 보고 싶어 견딜 수 없던 월선이는 하동장터나루에서 출발하는 마지막 나룻배를 타고 숨어들 듯 평사리로 찾아들고, 이를 안 강청댁은 선걸음에 장터로 내달려 월선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패악을 부리기도 한다. 소설 속 모든 인물들이 평사리를 떠나거나 혹 되돌아오던 길목의 개치나루. 이젠 강의 하상이 높아져 수로를 이용하지 못하는 아쉬움은 크게 남으나 육로교통의 눈부신 발전으로 많은 이들이 찾아들고 있다.

고소산성에서 바라본 섬진강과 평사리 들판
독자들이 이름을 붙인 고소산성에 있는 구천이(김환) 소나무 아래에서

2008년 5월 5일 작고하신 작가 박경리 선생이 소설 「토지」를 구상할 당시 작품의 배경지를 물색하던 중 우연히 연세대 대학원생이던 딸 김영주(현 토지문화관 관장) 씨의 탱화 자료수집 여행에 동행하게 되었다가 평사리를 본 후 무릎을 쳤다 한다. "내가 찾던 곳이 바로 이곳이다"라고. 어느 사석에서 평사리를 「토지」의 무대로 삼게 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내가 경상도 안에서 작품의 무대를 찾으려 한 이유는 언어 때문이다. 통영에 서 나서 자라고 진주에서 공부했던 나는 「토지」의 주인공들이 쓰게 될 토속적인 언어로써 경상도 이외 다른 지방의 말을 구사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석꾼'이 나옴직 할 만한 땅은 전라도에나 있었고, 경상도에서는 그만큼 광활한 토지를 발견하기 어려웠다. 평사리는 경상도의 어느 곳보다 넓은 들을 지니고 있었으며, 섬진강의 이미지와 지리산의 역사적 무게도 든든한 배경이 돼 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평사리를 「토지」의 무대로 정했다."

이처럼 3박자가 고루 갖춰진 소설 속 무대를 찾기란 쉽지가 않았던 것이다. 병풍처럼 둘러쳐진 지리산 남부의 능선 능선들하며, 그 넓은 들 앞을 젖줄처럼 흐르는 섬진강의 역동성이야말로 안성맞춤이었던 것이다. 고려 적 이인로나 조선조의 남명 조식이 회남재를 넘어 청학동을 찾아 헤매다가 결국 청학동을 찾지 못하고 "바로 이곳이 청학동이다"라고 극찬했던 악양, 그 중의 평사리가 「토지」의 무대가 됨은 실로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평사리는 상평과 하평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상평에는 60여 호 하평에는 40여 호가 생활하고 있으나 이는 인위적 나눔일 뿐 한동네나 다름없다. 소설 속에 묘사된 부분이나 작가가 소설 시작 전 스케치했던 지도를 종합해 보면 소설 속의 주요무대인 '최참판댁'은 상평마을에 속한 것으로 보인다. 1998년, 그 마을에 소설 <토지> 속 "최참판댁"이 현실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최참판댁 전경: 설경
최참판댁 전경: 솟을대문과 행랑채
최참판댁 전경: 별당

2001년 소설 속 '최참판댁' 준공을 앞두고 나는 원주로 달려갔다. 준공 이후의 '최참판댁'에 대한 활용방안을 찾다보니, 행정과 문학이 묘한 접점을 찾았던 것이다. 이는 '토지문학제'를 개최하여 박경리 선생의 문학적 업적을 기림과 동시에 한국문학을 이끌어나갈 후진양성에 방점을 두고 선생님의 허락을 구하기 위한 방문이었다.

넙죽, 큰 절부터 올렸다. 밝은 표정으로 우리 일행을 맞은 선생님께서는 하동군과 하동문인들의 제안서를 읽으신 다음, 완곡한 거절의 의사를 전하셨다. 딱 그날로부터 일곱 번. 나의 원주 걸음은 계속되었다. 항상 '뒷전을 편히 여겼던' 선생님을 설득하여 승낙을 받아내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고, 무엇보다도 당신 이름으로 제정되는 문학제나 문학상에 대한 심한 우려가 큰 벽이었다. 허나 나의 방문은 계속되었고 선생님께서도 마음을 여시기 시작했다. 마침내 승낙을 얻었으나, 문학제 명칭은 <토지문학제>로, 문학상 명칭은 <토지>나 <박경리>는 절대 양보할 수 없다는 선생님의 말씀을 받들어 <평사리문학대상>이 되었다. 2004년 문을 연 문학관도 <평사리문학관>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는 연유이다.

토지문학제에 참관하신 선생님(2001년)
「토지」를 완독한 독자들과 함께 최참판댁 별당에서(2001년)
최참판댁 전경

그해 11월 가을도 깊은 날, 마침내 선생님께서는 평사리를 방문하시게 된다. 물론 제 1회 <토지문학제>에 참여하시기 위함이었다. 따님과 사위인 김지하 선생님을 비롯한 돌아가신 박완서, 정공채 선생님 등 많은 문인들께서 선생님의 평사리 방문에 같이 하셨다. "전신이 떨렸다. 30여 년이 지난 뒤 작품의 현장에서 나는 비로소 「토지」를 실감했다. 서러움이었다. 세상에 태어나 삶을 잇는 서러움이었다." 라고 말씀하셨지만 그게 어디 서러움 만이었겠는가? 나는 공감했다. 허나 선생님의 평사리 방문이 그렇게 유쾌하지도 행복하지도 않게 느껴진 것은 그 다음이다. 이는 선생님의 성정과 철학에 기인한 것이라 다만 송구할 뿐이었다. 이틀 일정을 사흘로 늘리면서 진주여고 선배님도 찾아뵙고, 더러는 용돈도 드리고 원주로 돌아가신 선생님께서는 평사리 방문 소회를 참 깔끔하고도 소박하게 마무리하셨다. 이는 2001년 나남 판 「토지」 서문에 잘 나타나 있는데, 이를 읽은 나는 부끄러워 죽을 뻔했다. 내가 선생님께 7년 동안 배운 것은 염치(廉恥)다. 이는 자연과 사람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일 터인데. "집으로 돌아와서, 지금 나에게 남아 있는 것은 「토지」에 나오는 인물 같은 평사리마을의 할아버지, 할머니, 아주머니, 그리고 아저씨들의 소박하고 따뜻한 인간의 향기뿐 아무것도 없다. 충격과 감동, 서러움은 뜬구름 같이,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 같이 사라져버렸다. 다만 죄스러움이 가끔 마른 침 삼키듯 마음 바닥에 떨어지곤 한다. 필시 관광용이 될 최참판댁 때문인데 또 하나, 지리산에 누를 끼친 것이 아닐까. 지리산의 수난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라는 말씀에 주목하였기 때문일 터였다. 나는 선생님께 염치를 배웠지만 선생님의 서문을 읽고 그 염치없음에 부끄러웠던 것이다. 물론 지리산과 자연을 대하는 태도에서 말일 터이다.

박경리문학관 앞 선생님 전신상

그러나 <토지문학제>는 계속되었고, 지금까지 시·소설·수필·동화에서 50여 명이 넘는 문인들을 배출하였다. '박경리'라는 큰 함자를 대신하는 '토지'라는 그 무게감에 모든 수상자들은 무거워했고 기뻐했고 들떠서 상을 받곤 돌아갔다. 그들은 지금도 '토지'와 '박경리'라는 그 무게감과 기쁨을 잊지 않고 작품에 정진하고 있을 것이다. 하여 이제는 필자도 평사리를 마무리할 나이, 염치 있게 품격 있게 마치고 싶은 것이다. 평사리에서의 이십여 년이 과연 선생님의 '생명사상'을 실천은 했는지, 또한 사람과 자연에 대한 '염치'가 있었는지도 되돌아봐야 함도 내 몫이자 우리 모두의 몫일 터이기 때문이다. "한 분의 큰 작가를 만나고 모시고 기림으로서 한 사람의 사는 방향이 바뀌고 말았다"라는 말에 크게 토 달고 싶지 않은 20여 년이었다.

야윈 곳간이 늘 문제였다
비우면 언젠가는 채워질 거라는 말은
꽃이 피면 다시 올 거라는 말처럼
헛된 것이라서 쓸쓸했다

날이 저물면 저녁이 찾아들 듯
날이 새면 어김없이 오르던 평사리 - 行
늙은 자동차도 길을 다 외워 차도 나도 편안했던
평사리 - 行 이십여 년

이젠 늙어 기다릴 사람도, 받을 기별도 더는 없어
빈 곳간들을 사람으로, 문장으로 채워놓고

내 언젠가는 최참판댁 솟을대문을 등 뒤로 두고
개치나루 쯤에서 나룻배 하나 얻어 타고
흐르듯 떠나가겠지

나는 늘 평사리에서 누군가를 기다렸지만
이제 평사리가 나를 기다려도 좋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평사리 - 出

- 졸시 「다시, 평사리」 전문
최영욱
  • 1957년 경남 하동 출생.
  • 정공채 시인의 추천으로 <제3의 문학> 등단,
  • 시집 「꽃가지 꺾어 쳐서」. 「평사리 봄밤」. 「다시, 평사리」
  • 산문집 「산이 토하면 강이 받고」가 있다.
  • 현, 박경리문학관장
메인이미지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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